민19:11-19
민14장의 가데스바네아 사건으로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다음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세를 원망한 죄의 결과죠.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광야에서 그 시체가 다 엎드려지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시체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시체를 만지므로 사람들이 부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부정한 사람들이 정하게 되는 방법을 민19장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19장은 오늘날과는 달리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사람이 정결하게 되는 법을 설명하는데 우선 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었을까요?
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시체를 만지면 부정한 이유는 죽음이 죄 때문에 왔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죽음은 죄의 결과이므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사람은 정결의식을 통하여 부정에서 벗어나야 하는데요. 당시에는 시체를 만져 부정한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하죠?
12=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3일 째와 7일 째에 잿물로 정결하게 하라고 하는데 왜 두 번이나 3일째와 7일째 해야 할까요? 어떤 분은 “3일째” 뿌리는 것은 죄를 기억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목적이 있고, “7일째”의 뿌림은 7이 완전수로 부정에서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3일째”는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하는데요. 아무튼 두 번 잿물로 정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14=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의 법은 이러하니 무릇 그 장막에 들어가는 자와 무릇 그 장막에 있는 자가 칠일 동안 부정할 것이며”
시체를 만지지 않아도 죽은 자의 집에 들어간 사람은 부정하다고 합니다. 상을 당한 사람의 집에 문상을 가거나 방문하면 부정하다고 하죠. 그래서 정결의식을 해야 합니다.
15= “무릇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도 부정하니라”
그릇도 뚜껑을 덮고 끈으로 묶어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냄새가 그릇에 들어가서 부정하게 된다고도 하죠. 그런데 정결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물을 뿌리라고 합니까? 잿물입니다. 여기 잿물은 양잿물이 아니라 붉은 암송아지를 잡고, 불로 태운 다음에 그 재를 보관했다가 물에 타서 뿌리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9= “이에 정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데 쓸 것이니 곧 속죄제니라.”
잿물을 만드는데 쓰이는 짐승이 붉은 암송아지인데 이 붉은 암송아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개 속죄를 위한 제물에는 수송아지가 쓰이는데 정결의식을 위해서는 온유한 기질을 가진 암송아지를 쓰라고 하죠. 그런데 암송아지도 “붉은 암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죠. 이것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한다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10= “암송아지의 재를 거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그 중에 우거하는 외인에게 영원한 율례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에게도 다 같이 적용되는 규례라고 하는데요. 이처럼 예수님의 보혈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거죠.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씻을 수 있지만 효력은 믿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 사함의 능력이 있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또한 매일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민19장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 조각가가 3년에 걸쳐서 예수님의 초상을 조각하고, 같은 교회에 다니는 주일학교 학생을 불러서 “이것이 누구와 같으냐?”라고 물어보았는데요. 학생이 “어떤 유명한 사람과 같아요.”라고 하자 다시 6년간을 예수님의 초상을 조각하고, 그 학생에게 다시 물어보았는데 그 때 그 학생은 “예수님과 같다.”고 하자 그제야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프랑스에서 비너스 상 조각을 해달라고 요청이 들어왔는데요. 그는 “예수님을 조각한 이 손으로 어떻게 그런 것을 조각할 수 있겠소. 할 수 없소.”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부와 명예를 잡을 수 있는 기회라 할지라도 예수님 상을 조각한 자기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사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