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5, 2024

신12:1-14

본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는데요. 요즘으로 말하면 예배드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죠. 어떤 자세로 드려야 할까요?

1> 먼저 우상을 제거하라고 합니다.

3=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하나님 외에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택하신 곳에서 드리라고 합니다.

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이 어디일까요? 어떤 분들은 예루살렘이나,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잖아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의 어느 특정 장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요.

왜 이렇게 특정한 장소, 택하신 곳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당시 가나안 족속들은 자기들의 편리에 따라서 산이나 푸른 나무아래에서 편리한 대로 우상을 섬겼죠. 그런데 4절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죠. 5절에서 택한 곳으로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곳은 없지만 특별히 제사, 예배를 위해서 택한 곳이 있고, 거기에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가야겠습니다.”라고 할 때 바로 왕이 “여기서 드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죠. 그 때 모세는 “아닙니다. 우리가 3일 길을 가서 드려야 합니다.”라고 하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리아산으로 가서 드렸습니다. 3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드렸죠. 편하게 집에서, 편하게 가까운 산이나 들에서 아무렇게나 드리는 것이 아니었죠. 요즘은 어디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기만 계셔서 그런가요? 그건 아니죠. 그렇지만 예배를 위해 구별된 장소이기 때문에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것입니다.

3> 예물을 가져다 드리라고 합니다.

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찌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몸만 와서 드리면 되지 왜 예물을 가져오라고 하실까요? 예물을 드리는 것은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죠. 예물은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예물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죠. 헌금은 기부금이 아닙니다. 회비도 아니죠. “은혜에 감사합니다. 구원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4> 기쁨으로 드리라고 합니다.

7=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즐거워할지니라.”

12=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예배를 드릴 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대개 미국교회의 예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한국교회의 예배에는 엄숙함만 있다고 하는데요. 문화적인 차이죠.

시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배를 드릴 때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요즘 미국에서 예배드린다고 누가 잡아가기를 합니까? 때리기를 합니까? 우리는 좋은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죠.

1980년대에 어느 목사님이 구소련의 어느 비밀예배처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비밀예배처소에 가보니 예배를 드리기 전부터 성경을 읽으면서 울고, 낡은 풍금으로 반주를 하며 부르는 성가대의 찬양에도, 설교를 들을 때나 성찬을 나눌 때도 울음바다였다고 합니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왜 이렇게 울면서 예배를 드리느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예배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더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KGB에 잡혀가서 20년, 3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거죠.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감격스럽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요셉 케이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통치하에 있을 때 아주 유명했던 분인데요. 이분의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합니다. 요셉 케이보는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주일아침이면 3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가서 2시간 30분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면 공원에 가서 가져간 점심을 먹고, 쉬었다가 다시 2시간 30분의 오후예배를 드리고, 다시 3시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멀어서 주일마다 아침에 가서 밤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케이보 목사님이 어릴 때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매주일 멀리 가야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예배를 드리는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까!”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간과 정성을 쏟아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겠어요?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정성과 믿음이 있습니까? 조금만 멀어도, 조금만 귀찮아도, 조금만 아파도, 예배는 뒷전이고, “우선 몸이 편해야지” 그러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시편기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올 때마다 이런 기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